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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초 배우기

EBS 다큐프라임 : 앙트레프레너, 경제강국의 비밀 4부 - 왕들의 선택

by 경제와의동침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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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인류 역사 속에서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 뒤에는 늘 전쟁이 있었다. 15 ~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명분으로 앞장서서 외쳐진 것은 '신의 이름'였다. 종교전쟁의 시대 유럽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16세기에는 종교와 관련된 폭력이 난무했다. 

필립 살맹 : 당시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에서의 상황을 보면 16세기는 폭력의 시대였다.

장 이브 그리니에 : 전쟁은 16, 17세기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주권에서 무척 중요한 일부였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경제적으로 보면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새 항로와 식민지를 놓고 국가들 간의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경제 패권을 놓고 이들 국가들이 치열하게 갈등을 벌이는 시기였다. 

 

대항해의 시대가 가져다준 부와 황금을 차지하기 위한 유럽 경제 패권 전쟁, 그 소용돌이 속에서 앙트레 프레너들이 어떤 운명을 겪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영상이 말하는 것은

https://www.youtube.com/watch?v=PtNmomkLBHg 

 

16세기 유럽 대륙에는 나라의 운명을 바꾼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의 앙리 4세,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이들의 선택과 결정이 유럽의 패권 지도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1세기 후 또 다른 지도자들이 등장해 유럽의 인재들을 차지학기 위한 중요한 전투를 시작한다. 영국의 윌리엄 4세, 프랑스의 루이 14세, 스페인의 펠리페 3세,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이들 지도자들의 선택이 그들의 나라를 몰락과 부흥이라는 다른 운명을 이끌었을까?

 

근대 유럽에서 앙트레프레너들의 대규모 이동을 초래한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프랑스의 종교분쟁으로 인한 대학살(1572년),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낭트칙령(1598년), 스페인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인종 추방(1609년) , 유럽 최대의 인구 이동을 초래했던 낭트칙령 폐지(1685년), 영국의 운명을 바꾼 명예혁명(1688년). 이 다섯 가지 사건이 유럽의 경제 패권을 어떻게 바꿨는지 프랑스로 되돌아가본다.

 

오랫동안 관용을 베풀었던 프랑스, 4세기 전, 노트르담 성당에서 관용과 거리가 먼 끔찍한 사건이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다. 가톨릭 세력과 신교도 사이에 가장 첨예하게 벌여진 시기였다.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1560 ~ 157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신교도들이 프랑스 전체 인구의 10%에 달했다. 신교도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가톨릭 왕정은 점차 자라나는 신교도들 특히 개신교로 개종한 다수의 귀족들의 힘을 꺾고 싶어 했다. 

 

사건의 시작은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왕가의 결혼식에서 시작됐다. 신교와 구교사이를 잠재우기 위한 정략 결혼식이었다.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1572년 8월 파리에서 열린 왕가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많은 프랑스 신교도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결혼식의 신부는 가톨릭의 세력인 왕의 여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신랑은 오랫동안 왕가의 적이었던 신교도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였다.

 

조엘 코르네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이 결혼에서 앙리 4세(신랑)는 신교도의 우두머리였고, 여왕 마고(신부)는 가톨릭교도였다. 그래서 동시대인들은 결혼을 비난하였다. 특히 가톨릭교도들은 이 결혼을 비판하며 천리에 어긋나는 결혼이라고 주장했다.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파리에 있는 개신교를 믿는 귀족들을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개신교 귀족들의 힘을 철저히 제거해 버리려는 의도였다. 

 

화해의 결혼식은 피의 결혼식으로 변모했다. 신교도를 인정할 수 없는 가톨릭 과격파들에 의해 살육이 시작됐다. 결혼식에 참석했던 신교도 3천 명 이상이 피로연 밤에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조엘 코르네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처음에는 40, 50, 60명의 신교도 지도자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려졌다. 그렇지만 학살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됐다. 

 

파리는 피로 물들었고, 수많은 시체들이 센강에 던져졌다. 학살은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역사가들은 당시 약 1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으리라 추정한다. 8월에 파리에서 시작된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은 초가을이 될 때까지 프랑스 여러 도시에서 계속되었다.

 

피의 결혼식의 주인공이었던 앙리 드 나바르, 15살 때부터 신교도 군대를 지휘했던 청렴한 지도자였다. 그의 정략결혼이 프랑스의 안정을 가져다주기 바랐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고, 동지들은 모두 죽음을 맞았다. 영국과 스페인은 프랑스의 학살에 대해 상반되는 반응을 보였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청했던 스페인 군주 펠리페 2세는 학살의 주모자인 프랑스 왕가의 편을 들었다.

 

존 엘리엇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펠리페 2세는 이단을 몹시 싫어했다. 이단자들이 제거되는 걸 보고 기뻐했다. 가톨릭 세계가 더욱 안전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교도였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과 반대 입장을 보였다.

 

조엘 코르네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특히 영국의 경우, 프랑스 신교도에게 재정적 지원을 했을 뿐 아니라, 일부 병력을 보내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진영과 신교도 진영 사이의 국제전이 벌어지는 전장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프랑스 사회에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프랑스 서쪽에 자리 잡은 항구 도시, 라로셀. 당시 상업에 중심지였던 라로셀에는 신교도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다. 학살이 시작되자, 프랑스 전역의 신교도들이 라로셀로 모여들었고, 목숨을 건 탈출이 시작되었다. 

 

디디에 포통 (라로셀 프로테스탄트 박물관장) : 낮에는 라로셀 근처로 와서 이 근방에 있는 늪지대에 숨어 있었다. 어두워지면 해안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도망쳐 선박에 탑승하기 위해서 숨어 있었다.

 

프랑스를 떠나는 대 탈출의 행렬이 라로셀 해안에 길게 이어졌다. 16세기 유럽의 대규모 인구 이동을 초래한 프랑스의 종교 분쟁. 배를 타고 신교도들이 향한 곳은 당시 엘리자베스가 통치하고 있던 섬나라 영국이었다.

 

수잔 도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오는 걸 환영했다. 프랑스 신교도들의 정착을 허락했다. 그들을 프랑스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영국에 머물고 싶어 하는 신교도들을 보호했다. 

 

엘리자베스여왕이 신교도들을 받아들인 데에는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조엘 코르네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신교도들의 직업이 영국에 아주 유용했다. 많은 신교도들이 상인, 자본가였다. 영국의 경제적, 상업적 발전에 중요한 직업들이었다. 종교적 연대감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해관계도 있었다.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당시 프랑스의 신교도들은 '위그노'라고 불렀다. 영국이 위그노들을 경제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보통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은 엘리트로 여겨졌다. 도시의 신흥 계급인 사람이 많았는데 특히 상인이라든지, 중산층, 예술가들, 특수 기술직이나 새로운 일을 하던 사람들, 금융이나 상업과 관련된 일을 하던 사람들은 기꺼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다.

 

위그노 중에 경제적 중추를 담당했던 앙트레프레너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위그노들이 신봉한 새로운 교리는 종교개혁과 칼뱅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새로운 교리에선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라 여겼고, 건전한 이윤의 추구를 인정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신교 교리는 성서에 의존해서 신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따라서 신교집단에서는 글을 읽으려는 유인이 많았다. 이것은 인적자본이 확충되는 것을 의미했다. 인적자본의 확충은 기술과 지식을 받아들이기 좋은 사회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근대 상업사회로 이동하던 전환기, 경제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위그노들은 새로운 상업기술에 대한 지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위그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기술을 흡수해 영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시키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조엘 코르네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기는 상업과 경제가 상당히 발전하던 시기였다. 영국은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해외 영토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신교도들도 이러한 모험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경제부흥을 위해 이웃 나라 이민자까지 적극 활용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유럽의 변방 작은 섬나라를 대영제국으로 성장시키는 기초를 닦았다.  영국은 강대국였던 스페인을 위협하며 유럽의 강자로 떠올랐다. 프랑스 종교 분쟁으로 유럽의 패권지도가  바뀌는 걸 본 앙리 드 나바르는 프랑스를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유럽의 패권 지도를 바뀐 사건은 앙리 4세의 낭트칙령이다. 왕가의 대가 끊기자 프랑스 왕을 계승한 앙리 4세, 신교도 지도자였던 그는 왕위에 오른 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중대한 타협을 한다.

 

조엘 코르네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앙리 4세는 국가를 재건하고 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교를 바꿔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앙리 4세에게는 종교적 명분보다는 부유한 국가 건설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필립 샬맹 ( 프랑스 파리 제9대학교 경제사학 교수) :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그 당시 인구 과밀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해 기아로 고통받고 있었던 프랑스에서 매주 일요일 백성들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다고 한다. 그의 이런 면모는 프랑스인들의 마을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보수세력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던 앙리 4세, 그는 왕의 권위를 발휘해 신교도들을 위한 중대한 발표를 선포한다. 바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낭트 칙령이다. 낭트 칙령으로 인해 프랑스를 광기와 살육으로 내몰았던 37년간의 긴 종교 전쟁이 끝이 났다. 

 

구교도와 신교도 양쪽 모두 공존할 수 있도록 종교의 자유가 보장됐다. 신교도들에게 경제활동의 자유도 주어줬다. 유수한 능력을 가진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앙리 4세 시절은 위그노들에게 많은 개선이 있었다. 오랫동안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시절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1598년에 앙리 4세가 프랑스 전 국민에게 종교전쟁의 종식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wkFSR5ZHYXw&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12 

프랑스에 평화의 시대가 시작됐다. 앙리 4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 재건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조엘 코르네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앙리 4세 시대는 전쟁 대신 농업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국가 경제가 다시 부흥하고 도시 개발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도로와 운하가 건설되고 도시들이 발전했다. 농민의 세금은 줄고, 귀족의 세금은 늘었으며, 자유를 부여받은 위그노 상공업자들은 프랑스 경제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번영의 시대는 20년 만에 끝이 났다. 1610년 앙리 4세는 가톨릭 광신자에 습격을 받았고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조엘 코르네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라바이약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광신도가 앙리 4세를 칼로 죽인다. 라바이약은 앙리 4세가 거짓 가톨릭교도라고 확신했으며 실제로는 신교도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앙리 4세를 암살한 것이다.

 

백성들에게 성군으로 칭송되던 앙리 4세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프랑스는 부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멈춰 선다.

 

유럽의 패권 지도를 뒤흔든 세 번째 사건은 스페인에서 벌어진 인종 참소사건이다. 대항해시대를 주도했던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스페인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가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했던 스페인은 왕궁내의 종교를 가톨릭으로 통일하고, 스페인에 남아 있던 이슬람교도들을 쫓아내기 위한 대대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모리스코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슬람교도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당시 스페인에는 30만 명 이상의 모리스코가 거주하고 있었다. 펠리페 3세는 1609년, 모리스코인이 진정한 가톨릭인이 아니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그들을 일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 엘리엇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스페인 사회의 정화를 위한 엄청난 시도가 있었다. 오늘날에 인종청소로 알려진 것이다.

 

30만 명이 넘는 모리스코인이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됐다. 모든 자산을 빼앗기고 쫓겨난 모리스코인들은 추방과정에서 굶어 죽거나 탈진해서 죽었다. 모리스코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발렌시아 지방,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었던 이 지역에는 경제 위기가 닥쳤다. 농협과 수공업을 종사했던 모리스코인이 떠나자 도시를 이루던 손발이 사라졌고, 발렌시아 경제는 무너졌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해외로 빠져나가면 그 사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모리스코의 추방은 이런 면에서 두뇌유출이자 손발유출이기도 했다. 당연히 생산과 기술혁신을 담당하는 계층이 없어졌으니 쇠퇴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코의 추방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심각한 패착이었다.

 

콜럼버스에게 신대륙으로의 길을 터 주어 대항해의 시대를 열었던 스페인, 황금의 시대는 짧았고, 다양한 종교와 인종을 품 안으로 끌어안지 못했던 스페인은 유럽 패권 지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스페인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프랑스에선 새로운 군주가 등장해 유럽을 뒤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양왕'이라 불리며 절대왕정을 연 '루이 14세'였다. 

 

유럽의 패권 지도를 뒤흔든 네 번째 사건은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의 주인이었던 태양왕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화려한 문화와 예술을 유럽에 전파시켰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경제적으론 실패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수행한 전쟁 때문이었다. 

 

쟝 이브 그르니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자) : 그는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전쟁에 매료되어서 왕의 영광과 권위는 전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이 시기에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졌다. 경제의 관점에서도 루이 14세의 통치가 끝날 무렵 프랑스는 쇠퇴하게 된다.

 

루이 14세는 강력한 왕권을 위해 프랑스를 하나의 종교로 통일하기를 원했다. 1685년 루이 14세의 가장 큰 실정으로 꼽히는 사건이 벌어진다. 할아버지였던 앙리 4세의 종교 정책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종교적 단일성을 되찾고 싶어 했다. 루이 14세의 원대한 계획은 프랑스의 종교적 분열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피의 학살이 또 시작됐다. 드래건이라는 소총을 들었다고 해서 용기병이라 불렸던 군인들이 위그노 청소작업에 나섰다. 그들은 위그노들를 강제 개종시킨다는 명목으로 학살과 만행을 자행했다. 개종을 원하지 않는 위그노들은 또다시 프랑스를 탈출해야만 했다.

 

수잔 도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실제로는 개종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다수가 프랑스에서 비밀 신교도로 남았다. 가장 앙트레프레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주변국으로 떠났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로 5만 명이 넘는 위그노가 이주했고, 그동안 위그노들을 적극 지원했던 영국으로도 4만 명 이상이 떠났다. 네덜란드와 영국에 비해 경제가 낙후된 있던 독일과 스위스로도 수많은 위그노들이 이주했다. 장인과 예술가들, 앙트레프레너들이 프랑스를 탈출했다. 항구에서 배를 타지 못했던 이들은 육로로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 독일로 향했다. 독일에서는 망명한 위그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군주가 있었다. 브란덴부르크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 그는 군대를 보내 위그노들이 독일로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게 도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 대응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바로 포츠담 칙령이었다. 당시 독일지역은 30년 전쟁을 치르면서 극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겐 경제를 재건할 인재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시기에 프랑스에서 대규모의 인구 유출이 발생한 것이다. 

 

바바라 될레마이어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법률역사학 교수) : 포츠담 칙령은 위그노들에게 브란덴부크로 오라는 초대와 같았다. 그들에게는 특권을 줬는데, 경제적인 특혜와 일정 기간 세금 면제 그리고 집을 짓기 위한 일부 금전적인 지원들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위그노들이 관세나 통행료 없이 자유롭게 브란데부르크로 이동할 수 있게 통행증을 발부했다. 그가 파급적인 특권을 부여하며 위그노들을 영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독일의 많은 지역은 특히 숙련된 이민자들을 받고 싶어 했다. 지식층이라든지, 장인, 기술자 같은 계통의 이민자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프랑스 신교도들이 정확히 이 조건을 충족했다. 유럽에 그들을 필요로 하는 국가들이 있다는 것은 신교도들에게는 정말 행운이었다. 그들을 오게 하고 싶어 하는 국가들이 있었고, 베를린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베를린에 17세기 후반에 망명한 위그노들이 만든 교회가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베를린 경제를 일으킨 위그노들에 대한 기록도 만날 수 있다. 

 

바바라 될레마이어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법률역사학 교수) : 18세기 어느 시기까지는 베를린 사람들의 20% 정도가 위그노 후손이었다. 스스로가 위그노였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위그노로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지적인 지도층이자 엘리트로 여겼다. 베를린 사람에게는 '나는 위그노의 후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영광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4UnjerpMzQ&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13 

위그노들에게 특권이 보장된 집단 거주기가 마련되었다. 이 안에서 위그노들은 자신들의 학교와 교회를 세워 지적 자산과 기술을 전수했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갔다. 프랑스에서 이주한 위그노들이 독일 주요 도시들의 경제를 일으켰다. 

 

필립 베네딕트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역사학 교수) : 17세기말 베를린은 여전히 작은 도시였다. 만여 명이나 살았을까 하는 정도. 그러다 4천 ~ 5천여 명의 위그노들이 등장하자 베를린 인구의 삼분의 일가량 되었다. 

 

마을마다 이전에 없던 공장들이 세워지고,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물건들이 만들어졌다. 베를린으로 이주한 직업군을 살펴보면 섬유 산업과 관련된 장인들의 수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발달한 섬유 기술이 독일 경제에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필립 베네딕트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역사학 교수) : 프랑스 신교도들은 현지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다양한 기술들을 보유했다. 그리고 섬유 산업과 다양한 기술로 숙련된 장인들은 좋은 옷들과 공예품들을 소개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이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독일 지역에 새로운 생산 방식이 도입됐다는 것이다. 가내 수공업이 공장제 수공업으로 변모했다. 뒤처져 있던 독일 섬유 산업이 급속하게 발전하게 시작했다. 독일은 농업국에서 제조업 국가로 향한 발판을 서서히 다져나갔다. 

 

우르슬라 푸리히 그루버트 (독일 훔볼트대학교 역사학 교수) : 만약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가 위그노들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이 유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되기까지 발전하는 데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거라고 본다. 그 점에서 그들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경제적으로 나라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과 유럽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놓았다. 그래서 프로이센은 국제적 맥락에서 유럽의 중요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중요한 자산이 독일로 이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적 자산 유출에 대한 탄원서들이 루이 14세 앞으로 쏟아졌다. 루이 14세는 지식인들의 권고를 무시했다. 루이 14세가 이념의 통합을 내세우며 경제를 등한시한 동안 인적 자원 유실은 계속됐다. 루이 14세 재위 기간 동안 장기간에 걸쳐 해외로 이주한 위그노의 숫자는 100만 명에 달했다. 

 

필립 샬맹 ( 프랑스 파리 제9대학교 경제사학 교수) : 그 백만 명은 부르주아 계층이었고,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쟝 이브 그르니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자) : 오늘날  인적 자본이라 부르는 경제적 자원들이 루이 14세 시대에 영구적으로 프랑스를 빠져나갔고, 이로 인해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비교해 프랑스의 발전이 지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필립 베네딕트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역사학 교수) : 프랑스 위그노 상인들의 도주는 프랑스의 경제에 대단히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것은 18세기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끔찍한 정치적 실수였다.

 

프랑스를 빠져나간 위그노들은 스위스에서 시계산업과 섬유산업을 발전시켰다. 가장 많은 위그노들을 받아들인 네더란드에선 유럽의 패권을 뒤흔드는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한다. 네덜란드의 청도기자 후에 영국의 왕에 오를 주인공, 윌리엄 3세였다. 그는 유럽에서 대규모의 앙트레 프레너들의 이동을 이끈 주인공이다.

 

유럽에 패권 지도를 바꾼 다섯 번째 사건은 윌리엄 3세가 벌인 명예혁명이다. 1688년 월리엄 3세대는 대선단을 이끌고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의 왕이자 장인이었던 제임스 2세 대신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전쟁 없이 국왕의 교체가 이루어진 명예혁명의 주인공, 영국에 무혈 입성한 윌리엄 3세는 그의 아내 메리 2세와 공동으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의 장인과 기술자들을 영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프랑스 위그노들도 적극적으로 영위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에 남아있던 위그노들과 네덜란드로 망명했던 위그노들까지 윌리엄 3세 날개 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영국 문화와 경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베르사유의 가구 제작자 다니엘 마로, 그도 윌리엄 3세를 위해 일했다. 영국에 프랑스의 화려한 장식 문화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필립 베네딕트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역사학 교수) : 아마 약 4만에서 5만여 명 정의 위그노들이 영국에 갔을 것이다. 그들이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현지에 존재하지 않던 기술을 가져와 새로운 산업을 소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기존의 기술도 발전시켰다.

 

윌리엄 3세의 초대장을 받은 위그노 앙트레프레너들, 그들은 영국의 다양한 산업에 투입돼 그들만의 고급기술을 전수했다.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야는 섬유 산업였다. 프랑스의 실크 제조기술이 위그노들에 의해 영국으로 이전됐고, 린넨 제조와 염색 기술도 발달했다. 영국 산업 혁명의 초석이 다져지고 있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17, 18세기에 섬유산업은 가장 중추적인 산업이었다. 산업 규모가 크고 많은 인력을 고용하고 있고, 기술 개발이 중요한 그런 사업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산업혁명 시기에 위그노로부터 전수받은 직물기술은 영국이 산업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었던 잉글랜드 은행 설립에도 위그노의 역할이 켰다. 작은 섬나라였던 영국은 강대국 프랑스를 제치고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로 나섰다.

 

패트릭 카바넬 (프랑스 툴루즈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프랑스의 산업적, 경제적, 정치적 경쟁국은 영국과 독일이다. 그런데 망명한 프랑스 신교도들이 독일과 영국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서 일종의 이전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자본의 이전, 그리고 더 나아가 지식의 이전이 있었다. 프랑스가 잃은 것들을 독일이 가져갔고, 영국이 가져갔다. 

 

루이 14세 말기 프랑스는 기아와 질병에 허덕였다. 절대 군주로 추앙받았던 루이 14세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5살 증손자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그렇게 태양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엘 코르테트 (프랑스 파리 제8대학교 역사학 교수) : 자신 때문에 프랑스가 가난해졌고 전쟁으로 지쳤다. 프랑스를 다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평화가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루이 14세가 남긴 유언의 의미이다. 

 

독일의 태양이 질 때, 독일의 여명은 시작됐다. 프랑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은 2세기 후 유럽 최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영국은 루이 14세가 죽은 반세기 만에 산업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인류의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바꾼 산업혁명, 이로 인해 영국은 유럽의 변방국에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변모한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맞고 있을 때, 프랑스에선 다른 혁명이 일어나 유럽 사회를 뒤흔든다.

 

낡은 체제를 타파하고 주권은 인민에게 있음을 천명한 프랑스혁명. 학자들은 프랑스혁명의 촉발 원인이 루이 14세 때 있다고 말한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프랑스는 18세기 내내 경제 위기를 반복적으로 겪다가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을 맞게 된다. 루이 14세의 위그노 추방이라는 패착이 바로 그 씨앗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필립 샬맹 ( 프랑스 파리 제9대학교 경제사학 교수) : 낭트칙령의 폐지로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혁명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19세기의 부르주아들이 프로테스탄트(신교도)와 단절되지 않았다면 영국보다 훨씬 먼저, 좀 더 조화로운 방식으로 프랑스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할 수 있어겠다. 

 

역사의 기로 속에서 지도자들의 엇갈린 선택이 나라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16세기 17세기, 지도자들의 존재는 앙트레프레너들과 함께 경제 패권 전쟁의 중요한 비밀 중 하나였다. 이념에 집착하지 않고, 경제와 인적자산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군주들은 그들의 나라를 조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하나의 이념만을 고집하며 인적 자원을 내몰았던 군주들은 강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필립 베네딕트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역사학 교수) : 역사에서 한 가지 간단한 교훈을 집어내기란 늘 어렸다. 하지만 명확한 교훈은 이민자를 환영한 국가는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이민자들이 현지에는 존재하지 않던 기술과 지식을 들어오는 경우에 말이다. 그 시기 경제적으로 성장한 나라들 뒤에는 숙련된 이민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나라가 획득할 수 있는 이점에 대해서 빠르게 인식한 통치자들이 결단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 근대 유럽의 역사는 앙트레프레너를 잘 보호하고 활용한 나라가 앙트레프레너를 탄압한 나라를 압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종교라는 특정한 잣대를 근시안적으로 고집한 나라는 쇠퇴를 맞게 되고 반대로 앙트레프레너를 적극적으로 살리는 국가는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종교뿐만 아니라 신분, 출신지, 인종 이런 모든 차별을 없애는 것이 꼭 필요하다. 경제 강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잠재적 앙트레프레너가 차별을 받지 않고 자기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서 혁신을 이룰 수 있게 사회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하다.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앙트레프레너의 창의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지도자들, 그것이 경제 강국으로 가는 비밀의 열쇠 중 하나일 것이다.

 

 

감상평

이념을 넘어, 앙트레프레너들의 활동을 돕기 위한 감각, 촉, 느낌이 뛰어난 지도자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 영상에서도 2세기 정도에 역사적으로 남을 만한 지도자는 몇 명에 불과하다. 또한 세계 정세를 읽을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그런 혜안이 봤으면 바로 실행할 수 실행력이 살아있어야 할것이다. 지나 온 과거이기 때문에 그런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거는 현재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 언제 그런 기회가 올 지 큰 눈을 띄고 잘 지켜봐야 한다.

 

같이 보면 가치있는 영상

2023.04.24 - [경제기초배우기] - EBS 다큐프라임 : 앙트레프레너, 경제강국의 비밀 3부 - 부(富)의 법칙

 

EBS 다큐프라임 : 앙트레프레너, 경제강국의 비밀 3부 - 부(富)의 법칙

들어가며 이 영상이 말하는 것은 https://www.youtube.com/watch?v=eBnSkI11huE&list=PL2cXnoEDdx5J2jM_9w2aePKbBh1P8TpFa&index=8 영국의 운하가 만들어진 것은 200여 년 전이다. 당시 이 운하를 통해 버밍엄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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